당신이 쓴 것은
좋은 소설입니까, 나쁜 소설입니까
- 일몰의 저편 中 -
기리노 나쓰오 - 일몰의 저편
"나야 모르지. 하지만 이상한 소문을 들은 적은 있어. (중략) 요즘 작가들이 잇달아 자살하고 있다는 거야." (중략) “그거 다 우울증 같은 거 때문 아니었나?” “글쎄, 아주 건강했다는이야기도 있어. 연극계나 영화판에서도 요즘 부고가 많이 들려.”
주변에서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했거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소식이 뜸해지는 작가들이 있다는 소식을 주인공 마쓰 유메이는 듣게 된다. 그리고 '총무성 문화국 문화문예윤리향상위원회' 라는 곳에서 보낸 소환장을 받게된다. 소환장에는 며칠간 머물면서 강습이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들어보지도 못한 기관에서 소환장을 보내 찝찝한 마음에 이곳 저곳 알아보았지만 마땅한 정보는 없었다. 기르고 있던 고양이를 맡기기 위해 동생 신야에게 연락을 해서 요즘 작가들이 잇달아 자살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심하란 동생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은 탓일까. 총무성에서 보낸 장소에 간 마쓰는 그곳이 강습을 받는 장소가 아닌 요양소라는 이름의 감금 시설이라는 느낌을 갖게된다. 하루 내지 며칠 정도 강습을 참여하는 정도의 일정으로 갔던 곳에서 마쓴느 그 곳에서 감금되어 그들(문윤 소속의 요양소 직원들)이 원하는 글을 써야한다는 강요를 받게 된다. 요양소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지내게 된다.
요양소에서 마쓰에게 소환장을 보낸 사유를 듣게 되는데, 그들은 마쓰의 작품이 문제가 있다는 독자의 밀고를 받았다며 마쓰에게 작품 성향 전환을 위해 '요양소'에 머물 것을 강요했다. 편향된 생각을 품고, 작품을 만들어 내며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성향을 강제 전환 시키기 위해. 갱생을 위해 이 곳(요양소)에 갱생을 시켜 마음이 맑아지는 이야기,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이야기를 쓰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선생들은 편향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줄줄 흘리고 다니거든요. 이상한 글을 써서 태연히 돈 벌며 살고 있어요. 그걸 고쳤으면 하는 겁니다. 시정했으면 합니다. 선생들은 무책임하게 쓰니까 세상이 어지럽다는 걸 모르고들 있어요. 음란, 불륜, 폭력, 차별, 중상, 체제 비판. (중략) 작가 선생들은 정치 같은 데는 끼어들지 말고 마음이 맑아지는 이야기라든지 걸작을 쓰셨으면 합니다. 영화 원작이 될 만한 훌륭한 이야기 말입니다. 선생은 왜 못 쓰는 겁니까. 노벨상까지는 바라지 않으니까 적어도 영화 원작 정도는 되는 책을 써 주세요. 왜 그런 이상한 소설만 쓰는 겁니까. 진자 이상합니다.”
시시한 논리 들먹이지 마.
작품은 자유야.
인간의 마음은 자유니까, 무엇을 표현해도 돼.
국가권력이 그걸 금지하면 안 돼.
그게 검열이야, 파시즘이라고.
- 일몰의 저편 中 -
요양소에 갇힌 마쓰는 수차례 탈출의 기회를 엿보지만 인터넷이 되지 않고, 외딴 지역에 있어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는 근래에 사라진 작가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들이 이곳에서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우울증에 걸렸거나, 전향했거나. 이 이야기를 언급했던 동생 신야는 무언가 알고 있었을까?
배가 고프다. 화장지가 줄어들고 있다. 전화통화가 안 된다.
메일도 라인도 안 된다. 인터넷도 쓸 수 없다. 감시당하고 있다.
동료와 이야기도 못 한다. 밖에 나가고 싶지만 못 나간다.
이렇게 모든 자유를 빼앗긴 것을 알고 나면 사람은 순종적이 되는 걸까.
- 일몰의 저편 中 -
요양소는 요양소의 역할을 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식욕이라는 본능을 가지고 작가들을 길들이며 올바른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 마쓰는 그렇게 생을 마감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갱생과 전향에 대한 강요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요양원사람들과 싸워 결국 구속복까지 입고 감금을 당하게 된다. 일종의 갱생을 위한 실험체 처럼.
(이야기를 더 하면 결말까지 다뤄야할 것 같아, 여기까지 해야겠다.)
올바른 작품은 누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작가가 인고의 시간을 보내 힘겹게 나오는 작품 또는 책의 권리에 대해 국가가 관섭을 하면서 제재를 가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독재정권도 아닌 현재에 그런일이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일몰의 저편》 작품 속에서는 존재하고 있다.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갱생을 위해 마쓰에게 혹은 좋지 못한 작품을 만든 작가들에게 강압과 강요를 하며 교화를 하라고 강요한다.
《일몰의 저편》을 읽으면서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의 기준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 판단을 내가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이야기라고 해서 좋은 소설로 분류될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좋음'의 기준은 서로가 다른 것이고, 노벨상에서도 수여하는 그 기준도 다르니 노벨상을 못받았다고 좋지 않은 작품은 아니니까 말이다.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서 '좋지 않은 소설'로 평가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다양한 글과 문체, 생각이 공존해야 더욱더 건강한 사회가 형성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스스로에게 잘 맞는 작품이 있을 지언정, '나쁜 작품'으로 명명할 수 있는 작품은 없지 않을까 싶다.
편집자 후기에 기리노 나쓰오 작가가 <동양경제>와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된 내용이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에서는 쓰라린 패배를 묘사하는 소설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끝까지 싸워 달라, 그것이 소설로서의 올바른 자세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실에는 쓰라린 패배도 있고 전향도 있는 법이죠. 그걸 쓰는 것이 소설인데 지금 소설 속에선 패배조차 용납되지 않아요. 『일몰의 저편』은 그런 분위기와도 싸우는 소설입니다. (편집자 후기 중)"
책소개
어린이 성애증을 소재로 작품을 발표한 작가 마쓰는 문예윤리위원회라고 자칭하는 조직으로부터 소환장을 받고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되지 않는 어느 바닷가의 격리된 건물에 감금된다. 위원회가 밝힌 감금의 이유는, 어린이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남자들을 등장시키는 소설 속 장면을 마땅치 않게 여긴 독자들의 고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예윤리위원회의 요구는 간단했다. 누구라도 공감할 아름다운 이야기만 쓰라는 것. 이에 대한 반론은 허용하지 않으며 반항하면 감금 기간이 늘어난다. 외설, 폭력, 범죄, 체제비판이 담긴 글을 쓰던 작가들은 이곳에 갇혀 형편없는 취급을 받지만 위원회가 원하는 글을 쓰면 처우가 달라진다. 갱생과 투쟁의 갈림길에 선 작가의 운명은 과연 무엇일까.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에서 나온 대사 하나만을 뚝 떼어내 “이건 남성 혐오다”, “저건 여성 차별이 아닌가”라며 마치 작가가 실제로 남성을 혐오하고 여성을 차별한다는 식으로 트집을 잡는 사람들과, 이와 같은 흐름을 아무런 검증 없이 ‘논란’이라며 부추기는 미디어의 모습을 통해 ‘일본의 가까운 미래’를 그리고 있다.
[교보문고 제공]
소설을 끝까지 읽으면, 표지의 그림이 이해가 될 것이다.
정말 잘 묘사를 한 것 같다.
열심히 《일몰의 저편》 책의 후기를 작성했는데, tistory가 급 재시작되면서 작성된 글이 모두 사라졌다. 심지어 임시저장도 되지 않았다. 뒤로가기, 방문기록, 캐시 복구 등 여러방법을 했지만 아무것도 저장되지 않았다.
다시 작성하면서 그 전에 쓴 내용을 복기했지만, 그 전보다 더 좋은 내용이 되지 못해 아쉬운 것 같다. 어둡지만 읽을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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