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 흰 中 -
한강 - 흰
하얀 것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그 대상이 눈이 될 수도 있고, 솜사탕이 될 수도 있고, 구름이 될 수도 있고 다양한 대상이 떠오를 수 있다. 그럼 어떤 느낌이 들까? '깨끗하다.', '고요하다.', '포근하다.' 등 다양한 단어들의 느낌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흰》은 상상한 느낌과는 다른 방향의 하얀 것을 표현한다. 죽음과 애도, 고독과 고요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설이다.
사실 《흰》을 읽으면서 책의 겉표지를 굉장히 여러번 본 것 같다. 책의 겉표지가 이뻐서 보기도 했지만, 사실 읽으면서 '소설이 맞나? 소설이라고 표지에 써있는데?' 라는 의문을 계속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읽다보면 한편의 시라고 해도 맞을 것 같고, 에세이라고 해도 맞을 것 같다. 그만큼 짧은 문장으로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흰 것들'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고 있다.
앞서 말한 죽음과 애도는 태어나자마자 두 시간만에 죽은 나의 언니에 대한 것이다. 나에게서 시작되었던 하얀 것에 대한 시선은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며 '죽지마라' 말하는 엄마의 시선에서 죽은 언니에게로 옮겨간다. 본 적도 없는 언니에게 슬픔을 갖기보다는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는 것 같다. 살풍경한 느낌의 애도를 하는 것 같았다.
작가가 '흰 것들'에 관하여 책을 쓰기위해 목록을 만든 흰 것들은 굉장히 많다. 예컨대 강보, 배내옷, 달떡, 안개, 흰 도시, 젖, 초, 성에, 서리, 각설탕, 흰 돌, 흰 뼈, 백발, 구름, 백열전구, 백야,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흰나비, 쌀과 밥, 수의, 소복, 연기, 아랫니, 눈, 눈송이들, 만년설, 파도, 진눈깨비, 흰 개, 눈보라, 재, 소금, 달, 레이스 커튼, 입김, 흰 새들, 손수건, 은하수, 백목련, 당의정…… 등등 굉장히 다양한 것들이 있다.
흰 것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죽은 언니를 기억하고 있다. 이전에는 피하고 숨었지만, 숨지 못하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들춰내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그녀를 애도한다.
짧은 글들로 이뤄진 《흰》은 쉽게 읽히지만, 책 장을 바로 넘기기 어려운 소설인 것 같다. 한장 한장 읽을 때 마다 '먹먹하다.'라는 느낌이 들게만드는 이야기. 흰 것에 대한 65개의 짧막한 소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이던 작가는 경계를 허물고 죽음을 딛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또 다른 생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죽은 언니는 죽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삶을 향한 나의 의지이자 다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고, 살아, 죽지말고.'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 흰 中 -
책소개
강보, 배내옷, 각설탕, 입김, 달, 쌀, 파도, 백지, 백발, 수의…. 작가로부터 불려나온 흰 것의 목록은 총 65개의 이야기로 파생되어 ‘나’와 ‘그녀’와 ‘모든 흰’이라는 세 개의 장 아래 담겨 있다. 한 권의 소설이지만 각 소제목, 흰 것의 목록들 아래 각각의 이야기들이 그 자체로 밀도 있는 완성도를 자랑한다.
‘나’에게는 죽은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언니’의 사연이 있다. 나는 지구의 반대편의 오래된 한 도시로 옮겨온 뒤에도 자꾸만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들에 사로잡힌다. 나에게서 비롯된 이야기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겨간다. 나는 그녀가 나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하고, 그런 그녀를 통해 세상의 흰 것들을 다시금 만나기에 이른다.
[교보문고 제공]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 흰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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